top of page
  • Writer's pictureMike S Chi

욥기 1장 : 왜 사탄은 욥의 자녀들을 마지막에 죽였을까?

욥기 1장14절을 보면 드디어 욥의 고난이 시작이 된다. 욥의 종들이 들이닥치며 욥의 종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재산들이 약탁을 당함을 고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재앙에 대한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또 다른 재앙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때까지도 욥은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에 들이닥친 사람이 욥의 자녀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린다. 자식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음을 들은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를 자르며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기1장 18~20 (개역개정)



물론 욥에게 닥친 이 모든 재앙들이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서 욥 자신이 반응할 시간이 없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욥이 자신의 자식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한번에 무너지는 모습에서 정말 욥기의 말씀은 사실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자식을 잃어본 부모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그런 감정이기에 나는 욥기의 이 부분을 너무나 공감할 수 있었다. 사탄이 욥의 물질을 건드렸을때만 해도 욥은 정신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었다. 현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생각하고 분석할 여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명도 아닌 10명의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그런 여유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유나를 잃었을때 내 머리에 드는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경험이 이런것인가 싶다. 정말 내 생에 처음으로 주변의 아무것이 느껴지지도 들어오지도 않는 그런 상황을 맞이해봤다. 그냥 유나가 죽었다는 그 사실에만 모든것이 집중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모든것을 다 주고서라도 유나의 죽음을 되돌리고 싶었다. 돈도 사회적 지위도 아무것도 필요가 없었다. 그냥 유나만 다시 살아온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냥 내 모든것을 주고서라도 그 시간을 돌릴수만 있다면, 아니 유나를 하루만이라도 만나서 내가 유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그날 거기에 있어주지 못해서 얼마나 미안한지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유나를 잃고 힘들어할 때 옆에서 위로해주는 사람들 중 자신의 사랑하는 개가 죽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위로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 어떤 이야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도 개를 좋아한다. 하지만 개와 나의 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에게는 더이상 그 슬픔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너무나 믿었던 사람들한테 잠시 맡긴 자식이 죽었을때 그 슬픔과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다. 나는 만7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슬픔을 극복하는데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10년 동안 내가 겪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은 지금 유나를 보지 못하는 슬픔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유나가 죽은 후 5개월 후에 기르던 강아지가 급사했다. 유나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커서 그랬는지 강아지의 죽음에 대한 내 마음은 담담했다. 1년이 지나서야 강아지의 죽음이 마음에 아프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식의 죽음은 그 일을 당한자에게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증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아니 최악의 고통인 것이다. 욥의 성품으로 비추었을때 물질의 상실은 충분히 극복이 가능했을 듯 하다. 하지만 10명의 자녀를 한번에 잃었다는 것은 아무리 세상에 초연한 자라도,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라고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욥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기1장21절 (개역개정)


그의 입술은 주를 찬양한다. 그리고 범죄하고 있지 않다. 이 욥의 신앙고백이야말로 인간의 고통의 바닥에서 부터 나오는 고통스러운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성경 최고의 신앙고백이 아닐까? 다윗도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잃은 후 욥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사무엘하 12;20 (개역개정)


아이의 죽음 후에 다윗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를 한다. 그리고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다. 다윗은 아이의 죽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있었다. 그는 그 원인을 알고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과 강한 정신력을 가진 인물인 듯 하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된 행동으로 인하여 자식이 죽었음을 알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럴 경우에는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 좋을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욥의 자식들의 죽음의 시점을 보면 사탄이 얼마나 계획적이고 집요한지 알 수 있다. 사탄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있다. 우리가 사탄에 대해서 주의해야하지만 사실 사탄은 아주 예상가능한 방법을 쓴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아는 사탄은 자신의 메뉴얼대로 인간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사탄의 메뉴얼은 아주 단순하다. 사탄은 욥에게도 그대로 이 방법을 적용한다. 처음에는 재물과 종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욥이 가장 아끼는 자식들을 죽임으로 욥이 점차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무너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내가 기르던 강아지가 죽었을때 딸아이의 죽음의 슬픔의 무게로 인하여 그 죽음이 나에게 큰 아픔과 충격으로 다가오지 못했던 것 처럼, 만약 욥이 자식을 먼저 잃고 재산을 잃었다면 재산을 잃은 아픔과 고통은 아주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재산을 잃게하고 그 고통을 느끼게 한 후에 마지막으로 아주 큰 고통인 자식을 잃는 고통을 줌으로 욥의 정신적 고통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방법이 그 얼마나 잔인한가?


욥은 무너진다. 자식 10명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고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세상 그 무엇을 준다고 해도 바꾸고 싶지 않은것이 내 자식이다. 그런 자식을 10명이나 잃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때도 자신의 아들을 내어준 하나님의 사랑을 위대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자기 자식을 10명이나 잃었다. 이런 욥이 무너지고 하나님을 저주한들 그 누가 공감하지 않겠는가? 그 10명의 자식들과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저미어오는 그 아비의 마음을 그 누가 어떻게 위로하고 공감하겠는가? 하지만 1장 마지막에 주목하자.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기1장22절 (개역개정)


In all this Job sinned not, nor charged God foolishly.

Job 1:22 (KJV)


King James Version 의 말씀을 보면 단순히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리석게 (foolishly)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왜 오는지 모른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좋을 수 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고난의 이유를 물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가 그 사실을 알고 감당할 수 있겠니?” 라고 물으실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내 아이의 죽음이 나의 과실 때문이라면, 내가 이전에 한 어떤 행동의 결과였다면.. 난 아마 감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기를 지금도 바라고 있을 뿐이다. 나중에 내가 천국에 가서 그 이유를 알게된다면 그런데 그 이유가 정말로 나에게 있었다면 내가 엄청난 고통을 받을까? 그렇지 않다. 이미 나는 내 딸을 만나고 있을 것이고 더이상 그 이유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고난의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지금 그 누군가가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말은 아마도 "당신이 당신 딸의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다 ."라는 말일것이다. 아마 그 말 한마디로 나를 충분히 죽음까지 몰아갈 수 있을것이다.


9 views0 comments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