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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s pictureMike S Chi

욥기 2장 : 고난의 허락과 아브라함의 3일

전 포스트에서 왜 욥이 고난을 받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가 봤을때 선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왜 고난, 고통 그리고 시험이 찾아오는 것일까?



성경을 보면 우리가 살면서 받게되는 시험은 대체로 1)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 2) 우리의 욕심과 범죄함에 기인한 시험 그리고 3) 마귀가 주는 시험 이렇게 세가지로 나눠지는 것 같다. 이 중 욥이 당한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즉,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으로 보여진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고난과 시험을 주시냐고 물을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 더 잘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그들을 연단하듯이 하나님의 시험도 그런 관점에서 봐야하지 않나 싶다.


한가지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감당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개역개정)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욥이 이 시험을 감당하고 이길 수 있음을 미리 알고 계셨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탄은 자신의 능력으로 욥을 어떻게든 시험에 빠트리고 하나님을 저주하게 만들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가지 더 시험이 오더라도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시험의 바운더리를 정해 놓으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기 1:12 (개역개정)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욥기 2:6 (개역개정)

욥기를 보면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마귀가 욥의 몸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우리의 시험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가 있다는 것, 마귀가 임의로 그 시험과 고난의 영역을 넓힐 수 없다는 것에 어떤 시험이 오더라도 그 시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바운더리 내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욥 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의 예로 아브라함의 경우가 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데리고 삼일길을 걸어 하나님이 명하신 모리아땅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이삭의 몸에 손을 대지말라고 내가 이제야 너가 나 하나님을 경외하는줄 안다고 말씀하신다.

사자가 이르시되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1 (개역개정)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이 순종이 얼마나 큰 순종인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둘째를 천국으로 보내고 나서는 이 순종이 정말 크고 귀한 순종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부분이 있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근처 어디서 이삭을 드리게 하는 대신에 한참을 가야하는 모리아 땅으로 가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까?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그리고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신 것 같다. 막상 큰 일이 닥쳤을 때사람들은 생각보다 통 큰 결정을 한다. 나도 유나가 천국으로 간 그날에는 유나를 돌봐주던 사람들을 용서하기가 쉬웠고 그렇게 했다. 그날 병원을 찾아주신 담임목사님께서도 이일로 인하여 유나를 봐주던 분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이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하자고 하셨고 나도 아내도 동의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그 사람들이 유나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됐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 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지 않아도 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맞는 선택인 것인지 내가 내 사랑하는 죽은 딸을 위해 최선을 다 한 것인지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1980년도에 한국에 김득구라는 권투선수가 있었다. 김득구 선수는 미국의 맨시니라는 선수와 경기를 치뤘고 KO패를 당한 후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끝내 사망을 했다. 그 후 김득구 선수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기 기증에 동의를 했고 TV에 나와서 인터뷰를 할 정도로 강인한 모습을 보였줬다. 하지만 3개월 후에 김득구 선수의 어머니는 자신이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고 그래서 아들이 죽었다며 아들의 죽음은 본인 책임이라며 자살을 하셨다. 아들을 잃고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죽을 것 같았을까? 그 고통에, 그 죄책감에 이 세상을 살 수 없었던 김득구 선수의 어머니는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시고 만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김득구 선수의 어머니의 가슴아픔에 내 가슴또한 아프다.

생각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결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으로 가는 삼일은 그의 인생에 가장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땅으로 가는 것을 거부할 수 있었고 삼일동안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얼떨떨한 상태에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삭을 드리라는 명령을 따르기를 원하시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하기를 바라셨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신뢰하기를 바라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너 지금 당장 이삭을 재물로 드려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브라함은 “네 하나님” 이라고하며 당장 이삭을 재물로 바치려고 했을지 모르고 아브라함에게 고뇌의 시간은 거의 없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나중에 '내가 무슨 행동을 한 것이지?' 라며 고뇌하며 오히려 시험에 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브라함이 있던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 모리아 산 까지는 약 60키로의 거리로 그 당시에도 이틀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던 거리였던 것 같다. 이 길을 아브라함은 삼일에 걸쳐서 갔다. 아마 머리속에 너무나 많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천천히 간 것은 아닌가 싶다. 아들을 하루라도 더 옆에서 끼고 보고싶은 마음에 하루라도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한 아브라함이 너무도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유나를 하루만 볼 수 있다면 지금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다. 깊은 신앙을 가진 아브라함은 그 3일동안 외적인 흔들림과 불순종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평안할 수 있었을까? 잠을 잘 수 있었을까? 성경에 아브라함의 내적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 알 수가 없다. 그 또한 욥과 같이 고통속에서 “주신 자도 여호와 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 라고 생각을 했을까.

이 삼일의 시간에 대해 목사님께 생각을 여쭤보았다. 목사님께서는 '이 삼일의 시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시험과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만나기 위해서 주신 기다림의 시간일 수 있다.' 고 하신다. 비록 아브라함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아브라함을 만나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자식을 잃은 욥. 자식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하는 아브라함. 천국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 당시의 고통을 서로 어떻게 나누고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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