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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s pictureMike S Chi

욥기 4장~5장 욥의 친구를 누가 비난하는가

욥기 4장과 5장을 보면 데만사람 엘리바스가 드디어 입을 열고 욥에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엘리바스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욥이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며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부당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자 드디어 입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이야기의 시작을 보면 좀 흥미롭다. 그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본 듯한 경험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실제로 엘리바스가 하나님을 만나 본 것인지 아니면 혼자 착각이 있었던건지는 모르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엘리바스 또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임은 분명했던 것 같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말의 서두에 자신의 신비한 경험을 먼저 이야기를 함으로 자기가 얼마나 영적인 사람이고 지금 하려는 말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와 같은 것임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고자 하는 것 같다. 즉,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내가 신앙적으로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한다면 아침에 내가 한 QT에서 내가 느낀점, 어제 저녁에 생각난 말씀 또는 지난주에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섞어 넣으면서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깨어있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인지 먼저 나타내려고 할 것이다. 엘리바스가 보고 들었다는 말씀은 정확히 하나님의 말씀이었을까? 그게 진짜였는지 아니면 엘리바스가 정신이 없을때 보고 들은 자신만의 환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본인은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아마 엘리바스가 봤다고 하는 것이 그 자리에서 꾸며낸 거짓이었다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엘리바스는 거짓을 말하는 자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 욥기 4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바스의 하나님에 대한 말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책망을 하시지만 엘리바스의 말이 거짓이라고 하사지는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좋은 신앙을 가졌고 자신의 친구인 욥을 진정으로 아끼는 신실한 사람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상황들을 잘 이해하고 상황에 맞는 말씀을 전달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매일 새벽예배에 나오고 말씀을 암송하고 엄청난 방언기도를 하는 그런 성도들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 듣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고난을 당한 사람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맞는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럴거라고 생각을 했다. 최소한 이런 분들이라면 성령의 능력으로 남들보다 현명하고 바른 판단을 하고 자기가 이야기하는 것들과 행동하는 것들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서 깨닭은 것은 내 생각이 많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어려움이 있었을때 교회의 리더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터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비밀이 지켜지지 않고 내 이야기가 가쉽이 되어버렸을때 그리고 어떤 분들은 자신의 조언의 결과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가는걸 보고는 거짓말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상황을 보면서 정말 우리들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이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끔 하게 됐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나쁘다거나 신앙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그냥 우리들의 한계인 것인다.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만 나 또한 그 누군가에게는 똑간은 사람으로 보여질 수 있기에 정말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가 욥기를 다시 읽기전에 욥기에 대한 생각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

1)욥은 의로운 사람이다.

2)욥의 행위와 상관없이 욥은 재앙을 당한것이다.

3)그러므로 욥을 함부로 비난한 친구들은 옳지 않은 것이며 그들이 한 말도 틀린 말일 것이다.

그런데 데만사람 엘리바스의 말을 들어보면 그 내용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것 같다. 엘리바스가 어느 정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4장과 5장에 나오는 말과 같은 말은 할 수 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잘못의 첫번째 이유는 엘리바스가 욥이 고난을 당한 이유를 욥의 범죄함에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욥은 하나님앞에 큰 축복을 받은 자였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욥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는 그 누구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엘리바스는 자신이 잘못이 없다고 울부짖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욥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욥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있는 당사자인 욥에게 하기 힘든 말을 꺼냈던 것이다. 욥기 2장12~13절을 보면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라고 쓰여있다. 엘리바스는 욥의 이야기를 듣고는 와서 같이 울부짖고 마음을 아파했다. 그것도 칠 일 동안이나 함께 있으면서 말이다. 예전에 즐겨보던 미드 중 West Wing 이라는 미국 백악관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만든 드라아가 있는데 아직도 내 맘에 남아있는 대사가 있다.


The measure of a man is how does he behave when things are otherwise.


즉, 사람의 본성은 상황이 바뀌었을때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욥이 잘 나가고 풍요했을때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욥이 완전히 망하고 몸까지 병들었을때는 아마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이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사람들이 더 미신적이어서 모두들 욥을 보고는 필시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고 아마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이 와서 잠시 위로는 하더라도 며칠씩이나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있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처참하게 망하고 병든 욥의 모습을 보았을때 그 누구도 욥이 재기하여 다시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희망이 없는 욥을 보러와서 칠일이나 그와 함께 “땅에” 앉아있던 엘리바스는 진정으로 욥을 아끼는 친구였을 것이다. 유나가 죽었을때 달려와줄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 중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하물며 멀리 있다는 이유로 전화도 하지 않고 있다가 몇개월 후 미국에 돌아와서 나에게 전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카톡으로만 몇번 안부를 보내고 마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아마도 나만이 그 사람들을 가깝다고 느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두번째는 엘리바스는 인생은 뿌린대로 거둔다는 원칙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5장11절 부터 27절 까지 엘리바스가 하는 말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악한자의 계획을 막으시고 없는 자를 구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돌까지도 그 사람과 언약을 맺고 들짐승 마저도 화친을 맺는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본인이 잘못한 이유없이 고난을 당할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 (개역개정)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나 또한 대부분의 경우 사람의 인생은 뿌린대로 거둔다는 법칙에 의거하여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열심히 정직하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많이 본다. 하지만 때로는 살다보면 꼭 그 법칙과 상관없이 일이 생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욥의 경우가 그런 경우였다. 엘리바스는 욥이 본인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욥의 친구들에 대해서 비난을 하지만 나는 욥의 친구들에 대해서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 욥이 힘들때 끝까지 옆에 남아준 사람들이었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는 욥을 위해 칠일을 그와 함께 땅에 앉아서 슬퍼했고 울부 짖었던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욥에게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했다. 그 또한 그들 나름대로 욥이 회복되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욥의 친구들이 이 상황에서 조금더 욥을 더 이해했어야하고 함부로 조언을 하면 안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칠일의 시간을 욥과 함께 슬퍼하며 보냈다. 도대체 어떤 친구들이 그럴 수 있을까? 나같은면 길어야 하루이틀 같이 있다가 그냥 돌아가서 내 일을 봤을것이다. 적어도 욥은 인생에 3명의 진정한 친구를 둔 것이다. 나는 엘리바스는 자신이 아는 한도내에서 최대한 욥을 위해서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어려움을 당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옆에 같이 있어주면서 고통을 같이 나줘주는것은 정말 고귀하고 어려운 일이다. 이 세 친구들은 칠일동안 충분이 그 아품을 같이 공감했다. 그리고 나서는 그냥 위로만 하고 헤어진 것이 아니라 어렵사리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의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욥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신이 경험했던 신령한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만큼 욥이 자기의 말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엘리바스는 욥의 상황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공정하게 말을 하지 않앟기 때문에 나중에 하나님께 꾸중을 듣지만 하나님께서 욥에게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고 하신것은 이 친구들의 의도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한다.


섯부른 조언이 문제였을지 모르지만 깊은 신앙을 가진 욥도 알지 못했던 욥의 고난의 원인을 욥의 친구들이 어떻게 알고 욥에게 바른 조언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오히려 욥과 칠 일의 시간을 보낸 후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그 친구들이 진정한 친구가 아닌가 싶다. 인간적으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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