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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riter's pictureMike S Chi

욥기 6장 : 60일, 지정생존자

욥기 6장은 데만사람 엘리바스가 욥이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스스로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한다는 말에 대한 욥의 반응의 시작이다. 욥은 6장과 7장에서 지속적으로 본인은 이런 고통을 당할 만한 죄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평생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욥은 이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의 고통이 너무 커서 자신의 괴로움을 저울로 달아보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열명의 자식들이 얼굴이 하나하나 지나쳐 갈때면 아마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보다 더 한 고통에 그 순간순간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A scene from "Designated Survivor"


사탄이 사람을 괴롭할때 얼마나 집요하고 치밀한지는 여기서 잘 알 수 있다. 나와 나의 아내는 비록 유나는 천국에 갔지만 남아있는 아들 때문에라도 살아야했다. 정말 죽기를 소망했고 침대에 누우면 다음날이 오지 않기를 바랬고 깨지 않기를 매일매일 바랬다. 그래도 이런 살아있는 날들이 계속 된다면 점차 쇠약해저 죽기를 바랬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내가 마음을 다잡아야한다고 생각한 큰 이유중 하나는 나에게 남아있는 자식의 존재였다. 만약에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아들마저 죽었다면 그런데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 아이가 살아돌아왔다면 내가 큰 기쁨으로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 자살을 하고 싶었던 하루하루 나를 버티게 했던 생각 중 하나가 바로 남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의무감 때문이었다. 자신을 옆에서 지지해줘야할 아내에게도 외면받고 그나마 이 삶을 살아가게 해 줄 이유를 제공할 만한 자식하나 남지않는 욥에게는 죽음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이다. 열명의 모든 자식을 앗아간 사탄은 욥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이유를 모두 제거한 것이고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살하도록 계속 유혹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욥과 하나님이 생각 중 하나 공통된 점이 있다. 즉, 하나님도 욥도 욥이 이런 일들을 당할만한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욥기 6장14절 (개역개정)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욥기 6장 24절 (개역개정)


단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은 아시고 욥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을 받고 있을때 내가 당하는 이 고통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면 정말 혼란스럽고 괴롭다. 하지만 이전 포스팅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 고통의 원인이 자신 이라는 것을 본인이 알게된다면 그것을 감당해내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단, 다윗의 경우는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나은 아이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에 있음을 알게되었음에도 강한 신앙으로 그것을 털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는데 다윗은 보통 사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신앙과 강한 인간적인 맨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신앙의 깊음과 인간적인 맨탈의 강함은 그가 소년이었을때 골리앗을 상대해서 이겼을때, 사울의 손을 피해서 도망을 다닐때 지속적으로 보여졌고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더욱 강해졌으리라 생각한다. 다윗과 같이 신앙과 인간적인 맨탈의 강함이 조화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자녀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게되는 순간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나는 유나의 죽음이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살아있는 아들의 존재, 내가 스스로를 죽였을때 행여 유나를 천국에서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유나의 죽음의 원인이 하나님의 여러 계획 중 하나일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 때문이다.


하나님꼐서 욥의 고난의 원인을 욥에게 숨기신 이유는 아무래도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다른 이유지만 같은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욥은 의인이며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자기 앞에 두는 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원인 모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범죄하지 않기를 바라셨고 또한 확신하셨기 때문에 그 원인을 알려주시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사탄은 그런 상황이 와야만 욥을 무너트릴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욥아, 사실은 너가 잘못한거 없는거 내가 다 알아. 그런데 사탄이 와서 자꾸 너가 이러네 저러네 해서 내가 사탄이랑 내기를 좀 하고 있다. 그러니까 너가 좀 힘들게 될 거 같은데 한번 잘 참아봐. 그러면 나중에 내가 너를 갑절로 회복시켜 줄께. 그러니까 좀 참아, 알겠어?” 라고 하셨다면 욥은 이 상황을 아주 수월하게 넘겼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마귀는 이건 공정하지 않은 내기라고 하고 욥의 의인됨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내 잘못에 기인하지 않았을 때 그 원인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을 안다면 원인을 제거할 수 있고 그 원인이 제거될 때 까지 그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는 고통의 과정을 많이 완화시킬 수 있고 빠른 회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욥의 아내도 욥의 친구들도 아마 욥과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Netflix 에서 볼 수 있는 시리즈 중에 Designated Survivor 라는 드라마가 있다. (한국에서는 60일, 지정생존자 라는 제목으로 동일한 리메이크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의 시작과 더불어 미국의 대통령을 포함한 내각 및 상하원 의원들이 대부분 테러리스트 공격에 의해 사망을 하고 만다. 이 때 정부의 최우선 과제중 하나는 과연 누가 이 공격을 주도했는지 알아내고 그 주범을 찾아 처형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시국을 타게하기 위해서 새로 임명된 대통령과 살아남은 관료들은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주범을 찾아내고 찾아내자마자 주범을 잡아오는 것에 사활을 걸게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최대한 빨리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혼란을 극복하고 나라의 안정을 찾고 힘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하나님에 의하여 지정생존자가 되었고 사탄은 하나님이 저정하신 생존자인 욥의 생명을 건드릴 수 없었다. 지정생존자로 살아남은 욥은 이제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범죄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드라아에서와는 달리 자신을 도와줄 스태프도 없고 고난의 원인도 알아낼 수 없었고 자신이 지존생존자라는 사실도 알 수 없었던 욥은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해냐가야한다.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이 고통을 혼자서 헤쳐나갸아했던 욥은 급기야는 스스로가 믿는 하나님이 자신을 멸하기를 기뻐하신다며 다소 냉소적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욥기 6장 8~9절 (개역개정)


그러나 지금 이순간도 하나님의 주권자되심을 인정하는 욥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고난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욥은 그 누구 하나 자신을 지지해줄 사람을 찾지도 못하고 혼란스러운 가은데 모든 희망을 버리고 하루하루 죽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데만사람 엘리바스에 대해서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욥기 6장 14~15절 (개역개정)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욥기 6장 27~30절 (개역개정)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쌓여 하나님과의 단젊감마저 느끼고 있는 욥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이해해주지 않는 엘리바스의 존재는 아마 이미 생긴 성처에 또다른 상처를 주는 크나큰 고통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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